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8 서울 올림픽 (문단 편집) ==== [[탈냉전|냉전 종식]]의 밑거름 ====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 사실상 1970년대 전반에 걸쳐있던 [[데탕트]]의 분위기가 깨지고 갑작스럽게 냉전이 다시 촉발되던 시기였다.]으로 인해 각각 진영에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그저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당시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이는 개회식의 대미를 장식했던 [[손에 손 잡고]] 무대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대회 공식 마스코트인 [[호돌이]] 말고도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의 마스코트 [[불곰|미샤]]와 [[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마스코트 [[흰머리수리|샘]]이 함께 어울리는 상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즉 냉전에 의한 보이콧으로 얼룩진 직전 2개 대회의 아픔을 역설적이게도 냉전의 상징인 분단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치유하게 된 셈.] 이 대회는 특히나 과거 [[6.25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을 벗어나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와 진정한 의미의 [[데탕트]]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탈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연대기: [[중국|중공]]의 탄생과 [[6.25 전쟁]] → 도리어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마셜 플랜]], 동시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 실시와 [[쿠바 미사일 위기]] → [[베트남 전쟁]] → [[탈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탕트 논의, 자본주의 미국 & 공산주의 소련 세력과 별개인 [[제3세계]]의 출현 → 공산주의 국가인 [[중소결렬|소련과 중국의 대립]] & 공산 진영간의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공작, 이후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소련의 급진적인 변화, 북한과 중국을 제외한 동구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직전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점이 바로 서울 올림픽의 개최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 북한과 중국, 쿠바와 같은 일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전부 무너졌다.] 비록 북한은 올림픽을 반대하면서 불참을 선언하고 테러를 일으켰지만[* 1983년 [[아웅산 묘소 테러]]를 시작으로 1986년 [[김포공항 폭탄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굵직한 테러를 저질렀다.] 남한에서의 올림픽 개최, 그리고 이후 냉전의 종식을 고하는 주제곡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손에 손 잡고 가사중에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가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0년, [[독일 재통일|독일에서 진짜로]] [[베를린 장벽|벽을 넘게된다]].] 뿐만 아니라 공산권의 국기 게양 및 국가 연주가 이 대회에서 정상적으로 이뤄졌는데, 물론 국제 스포츠 대회의 대명사인 올림픽 특성상 정치 문제와 철저히 거리를 두는게 당연하다지만, 당시의 대한민국 자체가 [[6.25 전쟁|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전쟁]]이 끝난 지 4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철저한 반공 국가'''였음을 감안하면 공산권 국가의 여러 상징을 접한다는 것 자체가 경천동지할 법한 광경이었다. 그런데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한국인 관중이 소련, 동독, 중국을 비롯한 여러 공산권의 국가 연주 및 국기 게양 시 적대적인 반응은 커녕 오히려 선수단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으며, 이는 곧 대한민국도 냉전 체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는 북한의 불참으로 인해 더 돋보이는 측면도 있었는데, 만약 북한이 참가했더라면 대한민국 곳곳에 [[인공기]]가 게양되고 만약 금메달이라도 땄다면 [[애국가(북한)|북한 국가]]까지도 연주되었을 테지만, 북한 스스로 이 기회를 날려버렸으니... 한편으로는 서울 올림픽이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해석이 가능한데, 특히나 [[북한]]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선전)로 인해 [[대한민국]]을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그동안 익히 알고 있었던 동구권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진영이자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자국보다도 더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데서 시작된 것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올림픽 개최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년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어느 동유럽의 체육인이 한국 코치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며칠 후 갑자기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한국 코치가 그 요구에 응한 이후 부랴부랴 부인에게 연락해서 다시 식사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동유럽 체육인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한국이 헐벗고 못사는 나라인데 일개 체육인의 집이 너무 호화로워서 [[대한민국 정부|한국 정부]]가 [[프로파간다|선전]]을 위해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알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공산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을 '''거지 떼가 득실거리고 [[판자촌]]이 난무하는 빈민가 천지'''로 여겼는데 정작 개회식 및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한 서울의 모습이 도리어 자국의 번화한 도시보다 [[넘사벽]]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히 [[중국|당시의 중공]]이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올림픽 개최 4년 후인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만난 한국인들에게 서울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언급한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이 시기 1인당 [[GNP|국민 총생산(GNP)]]을 보면 1987년 기준으로 소련과 동독 모두 한국보다도 높았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2배 이상인 $8,000~9,000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동구권 유럽 국가들은 '''과거 미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봉쇄정책과 198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오일 쇼크|오일쇼크]]와 관련된 여파를 겪으면서 10년 넘게 경제가 침체 중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나마 유일하게 살만했다는 소련도 1980년대 중반 유가의 하락으로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여담으로 소련은 물론이고 그 후신인 지금의 러시아 또한 여전히 막대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석유를 주 수출 상품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잘살고 있던 동독은 그나마 서독, 일본과 교류를 통해 경제를 유지한 상태였다. 여기에 공산권 국가 특유의 '''고정환율'''에 의해 GNP 수치가 표기된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일례로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NP는 무려 $13,000로 같은 시기 $6,000에 조금 못 미치는 (IMF 통계 기준 $5,927, 세계은행 통계 기준 $5,817) 대한민국의 2.2배 남짓이었지만 이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환산한 결과에 불과하였고,[* 당시 서독은 '''유럽 2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었는데 (순위로는 미국, 일본, 소련, 독일 순서였다.) 바로 한 단계 높은 순위였던 소련의 경우는 그 특유의 '''통계 뻥튀기'''까지 겹쳐서 단지 시장 규모라는 몸집만 컸을 뿐 내실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서독이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대등하다는 주장하는 것은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 비공식 환율대로 환산하자면 $4,500 수준으로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낮았다. 물론 동독의 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임대료가 월등히 싸다는 걸 감안하면 동독의 구매력이 형편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치품을 사려고 한다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실제로 이 무렵 동독을 다녀온 서독 국민들은 '''"1인당 GNP $13,000의 나라가 왜 이리 못 사는가?"'''하고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즉, 동구권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형편이 좋았던 소련과 이러한 소련을 제외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위성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부흥했던 동독의 실질적인 경제 상황도 GNP 지표 수치와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보다 우세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고, 한국의 경제력과 국민 개개인의 생활수준이 동독, 소련 같은 동구 공산권의 대표적인 경제대국들과 맞먹거나 오히려 더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은 [[일제강점기|일제 치하 35년의 긴 식민지 강점기]]를 지낸 것도 모자라 올림픽이 개최되기 불과 35년 전 [[6.25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면서 전쟁 이전으로 복구되기까지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정도로 세계 최악의 빈민국 중 하나로 전락했음에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별 차이 안 나던 공산주의 국가들을 추월하여 더 잘 사는 경제를 꾸려나간다는 걸 서울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것이다.[* 6.25 전쟁을 휴전한 직후의 대한민국은 경제력이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 국가들 수준 혹은 그 이하였고, 국제적인 평가도 매우 참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냉전의 시발점이라 여겨지는 전쟁을 겪었던지라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매체에서 여러 번 언급되면서 빈민국 이미지가 국외의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다. 그랬던 국가가 훗날 개발도상국으로 성장하면서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물론 [[G20]]에 가입하고, 또 세계 경제 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고로 그간 수십여 년간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해 온 국가들은 한국을 본 뒤 자신들이 채택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이 절정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들은 이와 같은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행보[* 대표적인 예로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 혁명]]과 [[1989년 동유럽 혁명|동구권 국가들의 혁명]] 그리고 사실 훨씬 그 이전에 벌어졌던 [[1956년 헝가리 혁명|헝가리 혁명]], [[포즈난 항쟁]], [[프라하의 봄]] 등이 있다.]를 이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이듬해인 1989년 [[1989년 동유럽 혁명|동구권 공산정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의 신호탄과 [[소련 해체|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이념의 대립 경쟁에서 사회주의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이 [[폴란드]] 및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 [[슬로바키아]][* 당시의 통일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사회·공산주의를 위시한 동구권(동유럽) 유럽 국가들과 대대적인 수교를 펼치기 시작한 [[북방정책]]이 시작된 시기 역시 1989년부터였으니, 사실상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올림픽 이후 일이 수월하게 돌아갔다. 고로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해 전쟁과 기아, 가난이라는 키워드로 그간 알려져 있던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과 위상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